제목 : 혈기린외전(血麒麟外傳)
작가 : 좌백
출판사 : 시공사
평점 : ★★★★★
* 초강추 *
약자가 겪어야 했던 처절한 한 인간만의 전쟁.
상처를 모두 극복한 강자가 되기까지 겪어야 했던 왕일의 역경이 담겨있는 소설.
"나는 창주 무사 왕일이다! 이 중에는 나를 아는 자도 있을 것이다!"
유곰보가 뒤로 넘어갔다. 그는 한 마디만 거듭해서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저 녀석이……, 저 녀석이……!"
왕일이 다시 외쳤다.
"나는 또한 이대 혈기린이자 삼대 현무신군이고,
대종사 상산거사 이후 사대 금단문의 문주다.
누구든 부정하는 자 있으면 내 손으로 증명해 보일 것이다! 나설 자 있는가?"
그는 백호왕을, 그리고 청룡왕을 노려보았다.
백호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청룡왕은 양손을 벌려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해 보였다.
"짐작은 했네. 젠장!"
왕일은 남봉황을 향해 섰다.
그의 눈에 살기는 아닌, 그러나 무력하지는 않은 정광이 번뜩였다.
그는 이제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나는 왕일이고, 혈기린이기도 하지. 당신 말대로야.
진짜니 가짜니 따질 필요도 없이 그냥 나는 왕일이고, 혈기린이었던 거야.
지금까지 그걸 부정했던 건 그렇게 된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야.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되었다는 게 싫었지.
하지만 이젠 아냐. 나를 위해 죽어간 사람들, 내 손에 죽어간 사람들,
그 길고 고통스러운 살육의 여정이 나를 혈기린으로서,
왕일로서 존재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알았어.
나는 이제 진심으로,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어.
이게 나야. 나는 왕일이고, 혈기린이야!"
자리에 앉아 있던 마달이 이 순간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넌 왕일이고, 혈기린이었어. 뭐가 어려워."
― 3부 「비무」 중에서.
(작성 : 2005/02/08)
(수정 : 2006/08/06)
<혈기린외전>은 정말 오랜 시간을 들여서 봤던 글입니다. 항상 저에게 있어 술술 잘 읽히는 것이 무협의 미덕 중 하나였지만, 이 소설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혈기린외전>은 무겁고 무거워서, 읽기 괴로운 책이었고, 책장을 넘기면 어떠한 비참함이 나올까 두려웠던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든 것을 극복하는 왕일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이었던 책이었습니다.
<혈기린외전>은 한국무협소설을 말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작가분 중 한 명인 좌백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천마군림>에 이어 두번째로 본 좌백님의 글이기도 합니다.
천마군림도 재밌었지만, 이 혈기린외전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혈기린외전>은 역사전략소설과도 같은 치밀한 고증과 배경묘사가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한마디로 읽으면서 감탄할 수 있는 무협소설입니다. 여태까지 읽었던 무협중에 이런 소설은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무협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보는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혈기린외전>은 같이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은 멀리 느껴졌던 무협소설의 주인공이, 무척이나 보통 인간과 가깝게 느껴진 소설이었습니다. 주인공 왕일의 삶은, 어떤 누구보다도 치열하였고 험난했습니다. 너무나도 가난한 삶. 가족들을 배불리 먹여주고싶다는 열망 하나로 부잣집 아들을 대신하여 충군형을 살았고, 험하디 험한 남만에서 오직 살아남고자 노력했던, 불행한 사람이였습니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역사적 소수자들의 고달픈 삶이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항상 강한모습, 강자만의 소설을 추구하는 무협과는 다른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특히 힘 없고 약한 자였던 왕일이, 가족이 몰살당하고 누이의 치욕을 복수하기 위해 독하게 노력하는 장면은 가슴이 아플 정도로 처참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복수를 위해 살아남으려고, 무작정 독을 먹던 왕일의 모습은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로인해 왕일이 나중에 독인이 될 수 있었고, 결국 무림 최고수 혈기린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만...이렇게까지 비참한 삶을 살아야했던 무협소설의 주인공은 앞으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오직 복수를 위해 살아왔던 왕일이 복수를 이룬 후에 그 복수의 이유가 되어준, 자신의 삶의 의미가 된 누이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얼마나 허무하고 비참했을까요;; 여기서는 가슴이 완전히 미어지는 줄 알았습니다;ㅅ; 이후에 힘 없던 왕일은 누이의 죽음으로 무림에 뛰어들었고, 혈기린의 이름을 이어받아 결국 무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무림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왕일은 항상 사람을 무참히 죽이고 있는 자신에게 회의를 느낍니다. 그리고 혈기린의 가면 아래 두려움에 떨고있는 왕일, 자신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방황도 하였지만, 결국 혈기린의 이름을 이어받음으로, 왕일의 삶의 의미는 복수에서 다른 의미로 바뀌게 되고, 종극엔 그 의미를 자기 스스로 찾아냅니다.
이렇게 <혈기린외전>은 여타 무협들과 다르게 왕일이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내면적 갈등이 주가 되어있으면서, 왕일의 삶을 통해 삶의 의미에 대해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무협소설적 재미도 풍부했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의 냄새가 물씬 풍겼습니다.
'협'이란 무엇인지, 어떤것이 진정한 '협'인지...
왕일의 삶을 통해, 무협에서의 '협'의 의미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